강화 감리교회의 전래

강화 감리교회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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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교산교회 전경

 

   강화에 감리교와 성공회가 처음 전파된 것은 1893년 같은 해였으나 그 전래과정은 달랐다. 그 당시에는 외국인의 강화 성내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공회는 1894년 정부에서 갑곶이에 설립한‘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한국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강화읍에 진출할 수 있었다. 조선수사해방학당의 영국인 교관이 살던 동문안의 집을 매입하여 선교본부로 삼았기 때문이다.


    감리교는 그렇지 못해 강화 북서쪽 해변마을 시루미에서 선교를 시작 했다. 시루미에 첫발을 내디딘 선교사는 미 감리회 소속 존스(George Heber Jones ; 趙元時)목사였는데 그는 1892년 여름부터 인천에 머물며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고, 한강 뱃길을 이용해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눈여겨 본 강화에 복음을 전하려하였다. 그러나 그가 갑곶나루를 거쳐 강화읍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남문에서 입성이 거부되어 그의 첫 선교 시도는 좌절되었다.


    당시 존스 목사가 강화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첫째, 문호개방 이후 한국에 진출한 북장로회와 미감리회 선교사들이 1892년에 합의한“5000명 이상의 도시에서는 두 선교사가 같이 일하도록 하고 그 미만의 도시에서는 그곳을 먼저 개척한 선교부의 담당 구역으로 한다”는 ‘선교 구역의 분할(禮讓, Comity Arrangements)’ 때문이었다.


    둘째, 내한한 선교사들이 다른 피선교 국가에서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1893년 2월 한국의 선교 구역을 분할하여 장로교회는 한국의 서북지역을, 감리교회는 중부지역을 담당하기로 했었고, 셋째, 아펜젤러 이후 인천에 진출한 감리교회 선교사들이 강화해로를 이용해 서울을 오갔기에 그 길목이었던 강화는 자연스럽게 선교사들의 관심을 끌었다.

    넷째, 정부 시책 상 서울 30리 이내에서의 선교사 활동의 자유권과 서울 100리 이내에서만 호조(護照: 지금의 여권)없이 여행할 수 있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이후 존스 목사의 강화 선교의지가 현실화된 것은 1893년 강화 북서쪽 해안 서사면(현 양사면) 시루미 마을 출신의 이승환 덕분이었다. 그는 인천에서 주막집을 경영하였는데, 당시 인천내리 감리교회 신도들이 하던‘계’모임에 참여하면서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모친에게 신앙을 전파하여 존스 목사에게 세례를 의뢰했다.


   그러나 존스 목사가 이승환의 집으로 가려 했으나 다리목[橋項]마을의 김초시로 부터 거절을 당했다. 이승환은 결국 모친을 등에 업고 선교사가 있는 배에 올라 모친과 함께 선상세례를 받게 되니 강화에서의 첫 세례예식이었다.


   이로써 강화지역 감리교회의 첫 세례 교인이 탄생하였고, 존스는 인천의 이명숙(李明淑) 권사를 시루미로 파견해 이승환의 집에서 집회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오래지 않아 시루미에 탄생한 신앙공동체가 현재 ‘강화교산교회’로 불리는 강화의 첫 감리교회가 되었다.


    그 당시 선교사의 입촌을 거절한 유학자 김초시(김상임)도 1894년 10월 존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가 개종하자 그의 가족과 제자는 물론 다리목 마을 전체가 개종하였다. 김상임은 이승환의 집 예배소가 협소하기에 자기 집 앞마당에 열 두간짜리 초가집 예배당을 지어 예배 모임을 새 집으로 옮기게 했다. 이로써 시루미 평민들과 다리목(교항) 양반들이 한 곳에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후 교산 교인들은 강화 본도와 섬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세 줄기의 큰 흐름을 만들었으니 그 첫 뿌리내림이 홍의교회이다. ‘홍의마을'의 선교는 1896년 서당훈장 박능일(朴能一)이 교산교회 김상임을 만나면서 시작하였다. 박능일의 선교로 종순일, 권신일 등이 입문하였고, 1년 후 신도는 80명으로 늘었다.


    당시 신도들은 선교사의 도움 없이 토담집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서당을 학교로 바꾸어 신식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성공회의 갑곶이 학교(후의 진명학교)에 이은 강화의 두 번째 근대 교육기관이었다.


    홍의교인들은 한국 복음 전래사 중 독특한 두 가지 형태의 공동체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교인들이 모두 검은 옷을 입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들의 이름을 신앙의 의미로 새롭게 바꾸었다는 것이다. 성은 그대로 두고 이름 중 끝자를 한 일(一) 자 돌림으로 하고, 가운데 자는 신앙적 의미를 지닌‘충(忠)’·‘신(信)’·‘은(恩)’·‘혜(惠)’·‘능(能)’·‘경(敬)’·‘천(天)’… 등을 적어 제비 뽑아 정하였다. 이는 “한날한시에 믿었으니 같은 형제, 한 가족이다.”이라는 의미였다.


    이후 홍의교인들은 모두‘일’자 돌림을 쓰게 되었고, 부자지간에도 같은 날 믿기 시작하면 같은 돌림자를 쓰게 되어 부자지간이 형제지간처럼 되기도 했다. 이처럼 항렬을 따라 집단적으로 이름을 바꾸는 습관은 교동에서는‘일’자 대신‘신’(信)자 돌림으로 바뀌었고, 강화읍에서는 학교 이름을 지을 때도 이를 적용하였는데 합일학교가 그 예이다.


    홍의교인들은 강화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주역이 되었다. 권신일·혜일 부자는 서쪽 교동으로, 종순일은 남쪽 길상으로, 홍의교회를 시작한 박능일은 동쪽 강화읍으로 진출해 1900년에 잠두교회를 시작하였다.


   우리 화도지역은 1904년 장화교회를 필두로 1905년 내리교회에 이어 같은 해 1905년 화도시온교회의 전신 고창교회가 사랑방교회로 출발하였다.


                              [ 참고 : “신편 강화사 증보”. “강화교산교회 100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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