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이야기 71) 존 웨슬리의 사랑 4
그레이스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존 웨슬리는 베넷과 그레이스 그리고 동생 찰스를 용서했습니다. 그는 동생 찰스에 대해 원망하거나 배신감을 느끼거나 불쾌함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연의 아픔을 겪은 바로 다음 날 영국 북부 광산촌으로 복음을 전하러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설교대로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데 언제나 너그럽고 신속했습니다. 그는 남의 잘못을 품고 괴로워하며 상대를 미워하는 것은 자기 몸과 영혼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백대로 아무리 힘들고 무거운 일을 당해도 단 15분 이상 우울하게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속상한 일을 당하거나 슬픈 일을 만났을 때 더욱 하나님께로 가까이 갔고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서운 시련을 겪어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만 달려갔던 사람이었습니다.
베넷은 그레이스와 결혼한 후에 예정론을 주장하는 칼뱅주의자가 되어 존 웨슬리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베넷은 그레이스와 결혼한 후 10년 만인 1759년에 죽게 됩니다. 그레이스는 다시 과부가 되어 그 후 30년 동안 외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다시 과부가 된 그레이스는 감리교 교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으며 감리교 신도회를 충성되게 섬기는 일꾼이 됩니다.
존 웨슬리와 그레이스는 헤어진 지 40년 만에 런던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레이스의 요청으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서로 마주 보며 짧은 시간 서로를 향한 사랑을 회상했습니다. 만남은 감격적이었지만 그때 존 웨슬리는 86세였고, 그레이스는 73세였습니다.
존 웨슬리와 그레이스는 사랑의 추억을 더듬어가기도 힘겨운 황혼에 만나서 잠시 잡았던 손을 놓고 다시 헤어졌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이 땅에서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엄청난 시련과 눈앞이 캄캄해지는 좌절을 겪고도 바로 다음 날 버스탈에서 한번, 리즈에서 2번 설교했습니다. 그날 약 2,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존 웨슬리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는 설교한 후에 지역 신도회를 순회하고 다시 뉴캐슬로 올라가 선교본부의 일을 보고 로호데일로 옮겨가서 그곳에서도 설교했습니다.
로호데일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모였는데 청중들 중에도 존 웨슬리에 대해 욕을 하거나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욕하거나 존 웨슬리를 향해 돌을 던지면서 위협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두려워하지 않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사방이 조용해졌고 군중들은 존 웨슬리의 설교를 집중해서 경청했습니다.
그 후 존 웨슬리는 볼튼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은 가장 악명 높은 폭도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 폭도들은 감리교 설교자를 돌로 쳐 쓰러뜨리고 진흙 구덩이에 묻어버리려고 했던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존 베넷도 이곳에서 폭도들에게 며칠 동안 포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존 웨슬리가 도착하자 돌이 날아들었고, 개가 달려들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폭도들의 난동이 벌어졌습니다. 존 웨슬리는 높은 언덕에 올라서서 설교하고 폭도들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는 그날 거기서 세 번이나 설교하고 신도회를 돌보았습니다.
존 웨슬리는 베넷과 그레이스를 축복하며 떠난 보낸 후 잠시도 괴로워할 틈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실연과 아픔을 겪었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한순간도 멈추거나 중단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