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이야기 103) 미국 감리교회의 탄생 3

(존 웨슬리 이야기 103) 미국 감리교회의 탄생 3

시온 0 124


미국 감리교회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감리사 프란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1818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50년 동안 결혼하지 않은 독신으로 복음 전도에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당시 감리교 순회 설교자 중에는 결혼하면 복음 전도에 전념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신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국 성공회 목회자들 대부분은 귀국을 했습니다. 코크 감리사도 귀국했지만 애즈베리 감리사는 미국 시민권을 얻어 미국 땅에 남았습니다. 그는 평생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미국에서 복음 전도자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반면 코크 감리사는 영국으로 귀국하여 존 웨슬리가 죽은 다음에 영국 감리교회의 총무로 일하다가 인도 선교사로 가게 됩니다. 코크는 대서양을 항해하면서 아시아 선교에 헌신하다가 1814년 스리랑카로 선교하러 가다가 배 안에서 생을 마치게 됩니다.

존 웨슬리는 코크와 애즈베리를 감리사로 세웁니다. 감리사는 감독이란 명칭을 피하고자 존 웨슬리가 만들어낸 것이지만 실제 감리사의 권한과 직무는 영국 성공회 감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784년 크리스마스 총회에서 코크 감리사는 존 웨슬리가 감리사라는 직분을 만든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에게 감리사란 감독에 해당합니다. 우리의 감리사는 감독처럼 모든 일에 운영 권한을 갖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감독들은 마치 자기가 예수님이 된 것처럼 행세하며 양떼를 삼키고 사람들에게는 저주스러운 존재들이 되고 그 이름만 들어도 지겹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코크 감리사는 당시 감독들 대부분이 삯꾼 목사들이고 정치만 일삼는 교회의 백해무익한 존재들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감독과 대비해서 존 웨슬리가 감리사란 이름을 사용한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이냐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런 주장과 달리 1785년 미국 켄터키 주에 코크와 애즈베리 두 감리사의 이름이 붙여진 콕스베리 대학(Cokesbury College)이 세워집니다. 2년 후인 1787년 총회에서 애즈베리와 콕스는 감리사란 명칭을 감독(Bishop)으로 바꿉니다. 미국 감리교회의 명칭도 미국 감리교 감독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 of America)로 변경합니다.

 

영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존 웨슬리는 애즈베리에게 편지를 보내서 감독이란 칭호를 취소하고 다시 감리사의 명칭으로 돌아가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통신수단이 열악했던 시대여서 존 웨슬리의 편지는 늦게 도착하게 됩니다. 이렇게 탄생한 미국 감리교 감독교회는 이미 독립적인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1788년 존 웨슬리는 애즈베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실망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의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나는 당신들이 나와 다른 길이 가고 있는 모습이 걱정됩니다. 나는 작게 되고자 애쓰고 있는데 당신들은 크게 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나는 기어 다니는데 당신들은 활보하고 있습니다. 나는 학교(school)를 세웠는데 당신들은 대학(College)을 세웠습니다. 거기에 당신들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신들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습니다. 제발 조심하기를 바랍니다. 제발 엉뚱한 걸 추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하고 그리스도가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이 되게 하십시오(let me be nothing, and Christ be all in all).”

 

존 웨슬리는 코크와 애즈베리가 스스로 감독에 오른 것에 대해 애통한 마음을 갖고 모든 야심과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섬길 것을 간절히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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