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곶나루 선착장, 강화 통제영 학당지

갑곶나루 선착장, 강화 통제영 학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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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5호)

 

      갑곶나루 선착장은 강화에 다리가 만들어지기 전 김포 월곶면 성동리와 강화읍을 연결해 주던 돌로 쌓은 배터였다. 50여 년전 강화 집에 오려면 인천 서울에서 타고 온 버스와 함께 이곳에서 도선을 타고 건너야만 했다. 용산역을 출발하던 만원버스는  2차선 48국도를 따라 김포읍을 지나 나진검문소와 마송 통진에서 손님을 내리고 태운 후 털털대며 성동리 검문소에 다다른다. 염하를 건넌 후 지친 버스는 강화터미널에 도착해서 여러곳 군내버스에 손님들을 인계해 주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갑곶나루를 오가는 사람들이 물속을 수십 보 걸어가서 배를 타고 내리는 것을 안타까워한 박신이 사재를 털어 양쪽 언덕에 돌을 모아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박신은 세종이 즉위할 당시 명나라 북경에 가서 고명(국왕 인준서)을 가지고 돌아온 공로로 1432년(세종 14)에 후손들이 대대로 물려받을 수 있는 전지 65결을 받았다. 날카로운 비판도 망설이지 않는 사관조차도 박신에 대해서는 “곧은 마음에 너그럽고 자애로우며 어질다.”고 평하고,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를 만든 박신의 공로를 사람들이 잊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석축로는 조선 500여 년 동안 강화도의 관문이 되었다. 1920년대에 갑곶나루 위쪽의 용정리에 나루터가 생기면서 그 기능이 떨어졌으나 1937년 6월 30일 동아일보 기사에도 갑곶과 김포 성동리 간에 도선(渡船 : 차량과 우마가 탈 수 있는 나룻배)이 운항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지속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70년 1월 강화교(좌측) 완공으로 갑곶선착장은 완전 폐쇄되었고, 1997년부터는 강화교도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현재 강화는 1997년 완공된 강화대교(우측)와  2002년 8월 완공된 강화도 남단 강화초지대교가 서울, 인천을 연결해주고 있다. 갑곶 선착장은 현재 통행하는 강화대교 밑에 있었다.

 


강화 통제영학당지 (인천시 기념물 제49호)

 

     통제영 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로 전해진다. 조선수사해방학당, 통제영학당으로도 불렸다. 병인양요·신미양요·강화도조약을 겪은 조선정부는 해군 지휘관 양성을 목표로 통제영학당을 세웠다. 1893년 2월 기존의 수군편제를 근대식 해군체제로 개편하면서 같은 해 3월 해군사관 및 하사관 양성학교인 통제영학당 설립에 관한 칙령을 공포했다. 5월에 갑곶나루 인근에 교사를 신축하여 10월에 사관생도 50명, 수병 300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하였다.

 

    영국 해군 대위 콜웰과 하사관 커티스가 교관으로 부임하여 교육하였으나 이듬해 발발한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등의 영향으로 교육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1894년 10월에 일본의 압박으로 폐교되었다.  두 다리 사이에 강화 통제영학당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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