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행합일(知行合一)의 강화학파 이건창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강화학파 이건창

마리힐 0 5453

  18세기 초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민족 주체적인 학풍을 형성하고 새로운 인간 발견의 정신세계를 심화시켜 나갔던 문인 학자들의 학맥인 강화학파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 바로 강화이다.

 

   이건창은 할아버지 이시원이 개성유수로 재직할 때 유수관아에서 태어났다. 정종의 후예로서 이조판서 시원(是遠)의 손자이고, 증 이조참판 상학(象學)의 아들이다. 이건창 생가는 사기리에 있고 명미당이라 이름한다.

  

   이건창은 일찍이 조부 시원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문장이 뛰어났다. 1866년(고종 4)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해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당대의 문장가들과 교우하였으며, 충청, 경기 우도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여 일체의 관직을 버리고 향리인 화도면 사기리에서 일본 침략세력을 배척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병인양요 때 강화에서 자결한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척양척왜(斥洋斥倭)주의자로 일관하였다.

 

  이건창은 당대의 가장 냉절한 강화학파 지식인에 속하였으나 자신들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나타내기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사상을 문학적인 시와 산문으로 형상화하여 담아내는 일이 많았다. 당시 당쟁 때문에 정치이념이 구현되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해서 붕당 정치사인 ≪당의통략≫을 집필하였다. 객관적 입장에서의 우리 민족사 연구는 이면백(李勉伯)의 ≪해동돈사(海東惇史)≫와 이건창(李建昌)의 ≪당의통략(黨議通略)≫으로 이어졌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는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인 강화에서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건창(1852∼1898)의 묘소(인천시 기념물 제29호)는 양도면 건평리 655-1, 건평교회 앞 야산에 묘비조차 없이 있다. 생가 명미당 건물 바로 옆에는 이광명(李匡明) 묘, 이시원(李是遠) 묘 등 선조들의 묘소가 있다. 선두포석비군이 있는 사기리 선두포 둑에는 조선시대 제작된 이건창 영세불망비가 있다

     

 명미당집 길 건너에는 천연기념물 제79호 사기리 탱자나무가 있는데 이건창의 선조인 이광명의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강화도에 왔을 때 민가에서는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담아 탱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는 약 400살로 추정되며 강화가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강화도 해안가에 가시가 날카로운 탱자나무를 심어 적의 침입을 막고자 했다. (참고 : 강화사 중편)

 

     이건창 생가(李建昌生家)

             지정번호 : 인천시 기념물 제30호

             지 정 일 : 1995년 3월 1일

             소 재 지 : 강화군 화도면 해안남로 1114번길 6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대문장가였던 영재 이건창(1852∼1898)이 살았던 집이다. 이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기둥이나 보 등의 치목수법(治木手法)으로 볼 때 1백여 년이 된것으로 판단되며,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삼량(三樑) 가구로 몸 전체를 짠 전형적인 한옥의 구조로 되어있다. 안채는‘ㄱ’자형이며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고, 안방 앞으로 부엌을 내는 등 경기도 지방의 일반적인 살림집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96년에 대대적으로 보수·재정비하였다. 이건창은 어렸을 때부터 강화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할아버지로부터 양명학을 바탕으로 공부를 하였다. 2018년 5월 현재 보수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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