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을 갖고 삽니다

신념을 갖고 삽니다

시온성 0 6268

​​신념의 사람, 믿음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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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신념을 갖고 삽니다​​​​. 그 중에서도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흔히 의지가 강한 사람을 ‘신념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따라 마지막까지 달려가는 사람을 ‘집념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때로 신념과 믿음을 잘 구분하지 못한 신앙인도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에는 신념과 믿음은 같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신념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고, 신앙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념의 사람은 강한 의지력과 정신력으로 당한 어려움을 잘 극복하기도 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때로 넘어질 때에도 금새 일어섭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종종 성공과 기적을 창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합니다. 내게는 자신감도 부족하고 능력도 부족함을 압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내게 있는 능력보다 하나님을 더 굳게 붙잡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힘을 공급받아 살아갑니다. 어려움을 이기는 힘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임을 압니다. 모든 힘과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알기에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삽니다. 하나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힘씁니다.

 

신앙의 사람도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긍정의 근원은 자신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념이나 의지에서 오는 긍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에서 긍정을 인정합니다. 조엘 오스틴(Joel Osteen)이 쓴 『긍정의 힘』이란 책이 위험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함으로 얻어지는 긍정이라면 그 ‘긍정’에서 오는 힘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 ‘긍정’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불신앙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비록 같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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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쟁이와 예수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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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쟁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예수믿는 사람들을 얕잡아 보는 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쟁이라는 말이 그리 싫지 않다.

나의 예수쟁이라는 말의 해석은 예수님에 대한 전문가라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모든것을 알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여로와)을 알되 힘써 알자라는 말은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예수님을 배우자는 말이 될 것이다.

 

얼마전에 천주교인이 써놓은 글을 읽었다.

내용은 우연히 기독교 방송을 들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 남편은 직장과 가정과 교회 밖에는 모른다는

말을 듣고 답답함을 느꼈다는 내용이다.

 

가끔 신앙간증을 할때 이런 사람들의 신앙은 대단하구나 느꼈던터라 그분의 주장을 계속해서 읽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쟁이가 되지 못하고 교회쟁이가 되었다는 안타까움의 글이 였다.

 

교회안에 갖혀서만 신앙생활하는 기독교인들을 채근하는 말을 듣고는 양심이 찔렸다.

교회에서만 열심히 하면 신앙 좋은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풍토는 교회안에 고질병으로 자리 잡은지 오래 되었다.

 

예수님은 교회를 중요시 여기셨지만 세상과 소통하며 복음 전하는 일을 하시기 위해 교회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전력을 다 하셨다.

 

 

너희는 교회의 빛이요 소금이라 가르치지 않으시고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라 가르치셨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교회 안에서  옳바르게 살며 예수믿고 천국가면 되었지라고 생각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는 신앙인이 적지 않다.

리더들은 교회안에서 충성을 다하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것을 주문 하면서도 세상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교회안에서의 생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교회 중심이 되어서는 안된다.

썩어져 가는 세상에 나아가 부패하지 않는 방부제 처럼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교회에서의 가르침 중에 세상에 빠지지 말고  살라는 말을 많이 접하였을 것이다.

물론 세상의 죄악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세상과의 관계나 소통을 하지 못하면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도 없고 모든 관계는 끊어져 교회가 할 일이 없어진다.

 

예수님은 기도 하는 일을 빼고는 사람 만나는 일에 공생애의 대부부을 할애 하셨다.

신구약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사람들을 통하여  하셨음을 본다.

하나님이 직접 하실수도 있으나 하나님은 수많은 주의 종들을 통하여 일 하시며 역사를 이끌어 오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교회쟁이가 되어서는 부르심에 소명도 소용이 없고 더구나 사명을 감당한다는 말은 허구가 될 수 밖에 없다.

 

세상에 나아가 교회쟁이가 아닌 예수쟁이로 살아서 하나님을 몸으로 보여 주고 행동으로 성경을 해석해 주어야 한다.

 

사도 바울도 평생을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전력을 다한 인물들이였다.

특히 목회자들이 세상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소극적이라면 문제가 있다.

세상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소망을 주고 소통하며 그들을 품을 수 있어야 진정한 목회라 할 수 있다.

 

우물안에 개구리처럼 교회안에서만 예수를 외치면 세상이 듣지 못한다.

죄악으로 허덕이며 사는이와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일이 강도 만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서  네 이웃을 찾아가지 않는자는

니느웨이를 가기 싫어 도망하였던 요나와 같다 할 것이다.

 

나는 교회쟁이인가 예수쟁이 인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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