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이야기 113) 존 웨슬리의 장례식
1791년 3월 9일 존 웨슬리의 장례식은 존 웨슬리가 미리 유언한 대로 치러졌습니다. 그의 시신은 값싼 모직으로 쌌고, 평소 그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가난한 사람들 6명이 운구를 맡았습니다. 존 웨슬리는 그들의 수고비로 한 사람당 1파운드씩 돈을 남겨 놓았습니다.
“나는 영구차나 마차나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방패나 어떤 종류의 허례허식도 사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다만 나를 사랑하고 아브라함의 품까지 나를 따라 올 사람들의 눈물만 있으면 족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의 유언 집행인들에게 엄숙하게 청하니 이 모든 것을 정확하게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존 웨슬리는 죽기 전에 모든 돈과 물건을 가난한 사람들과 설교자들과 끝까지 자기를 돌보느라 고생한 사람들에 다 주고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그가 입었던 성의와 수저 한 개뿐이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의 초상화로 장식된 과자 한 개씩을 받았습니다.
장례식이 치러진 예배당은 전체가 검은색 천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에 검은색 천으로 가난한 여인 60명에게 옷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파운더리 예배당 자리에 1778년 새로 세워진 런던 시티로드 예배당 뒤편 묘지에 묻혔습니다. 충성된 감리교 성도였던 존 웨슬리의 누이동생 마르다가 4개월 후에 85세의 나이로 죽어서 존 웨슬리가 묻힌 자리 옆에 함께 묻혔습니다.
존 웨슬리의 관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라틴어로 쓰여 있었습니다.
요하네스 존 웨슬리 문학 석사
전 옥스퍼드 링컨 대학 펠로우
1791년 3월 2일 소천
향년 88세
존 웨슬리는 50세의 나이인 1735년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고 미리 자신의 묘비명을 적어 놓았습니다.
“여기에 불 속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 존 웨슬리의 몸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는 51세의 나이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빚을 갚고 단 10파운드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저는 다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무익한 종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러나 존 웨슬리의 묘비명은 그가 써놓은 것과 아주 달랐습니다. 그의 묘비명은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아주 긴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옥스퍼드 링컨 대학 펠로우, 문학 석사, 존경하는 존 웨슬리를 추모함. 이 위대한 빛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로 일어나서 이 민족을 깨우쳤고 초대 교회의 순수한 사도적 교리와 실행을 회복시켰고 강화했고 확립했습니다. 그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육신의 수고와 책들로 이것을 옹호했고 이 나라들만 아니라 전 세계에 그 영향력을 확장했습니다. 표현하기 어려운 기쁜 마음으로 전한 그의 영향력은 사람들의 마음과 삶 속에 증거되었고, 모든 인간의 능력과 기대를 초월하여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 위에 확립되었고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여 미래 세대에게 큰 복이 되었습니다. 이 비문을 읽은 분들이여. 그를 축복하는 것이 마음에 거리끼신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잠깐 고난의 수고를 마치고 그는 1791년 3월 2일에 88세로 죽음에 대한 영광스러운 승리와 함께 그의 생을 마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