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이야기 42) 장애인들과 귀족들의 회심
존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 중에는 장애인들과 가난한 자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집(poor house)’에 살았습니다.
이런 집에는 불치병에 걸린 병자들과 팔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들과 눈먼 시각장애인과 농인(聾人)과 오갈 데 없는 노인들과 폐인이 되어 사회생활 못하는 사람들 등 극빈자들이 함께 모여 살았습니다. 영국 정부는 감옥의 방이 부족할 때는 죄수들을 이곳에 가두어 두기도 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정기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집’을 방문했습니다. 또 감리교 성도들에게 이런 집을 방문해서 정기적으로 전도하고 돌보도록 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집’에 사는 사람들을 향해 긍휼의 마음을 품고 대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버려진 영혼들을 향해 깊은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리교 성도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사랑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집’에서 많은 회심자가 나왔습니다. 나중에는 감리교회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집’을 직접 세워 이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돌보게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는 광부, 공장 노동자, 장애인, 죄수, 군인들처럼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 겪는 사람들의 아버지였고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존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 중에는 귀족이나 상류층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감리교 부흥 운동 후반기에 가서는 상류층 사람들이 존 웨슬리의 설교를 들으러 많이 왔습니다. 이들은 존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감리교 속회에 들어왔습니다.
존 웨슬리가 웹윗(Epworth)에서 설교할 때 30살이 되도록 단 한 번도 교회에 가본 적이 없었던 젊은 귀족이 그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설교를 듣던 그는 땅바닥에 발이 떨어지지 않아 동상처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가족이 와서 그를 데려갔습니다. 그는 집으로 가서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경건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10년 후에 존 웨슬리는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존 웨슬리가 레스터(Leicester)에서 설교할 때 한 부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영혼의 평안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존 웨슬리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는 존 웨슬리의 기도와 전도의 말을 듣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했고 신실한 믿음을 얻었습니다.
헌팅턴(Huntingdon) 부인은 돈이 많은 귀족이었습니다. 그녀는 존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감리교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감리교 부흥 운동의 가장 큰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중에 존 웨슬리와 결별하게 되었고 조지 휫필드의 충실한 후원자가 되어 칼빈주의 감리교회를 창립했고 신학대학까지 세웠습니다.
존 웨슬리는 헌팅턴 부인을 통해 영국 상류층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많은 상류층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감리교 성도가 되었습니다. 특히 런던 상류층 사람들이 감리교 성도가 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콘월 지역은 감리교 부흥 운동 초기부터 말씀의 능력이 크게 나타났던 곳입니다. 그 지방 판사는 감리교 설교자들이 문제아들을 모두 새사람으로 바꿔놓았기에 자신은 할 일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감리교 부흥 운동은 실제적인 변화가 순식간에 일어나는 거룩한 열매가 있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