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이야기 8) 감리교의 시작

(존 웨슬리 이야기 8) 감리교의 시작

시온 0 452


감리교는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언제를 감리교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까요? 존 웨슬리가 회심하고 모라비안 형제들에게서 독립을 선언한 순간이 감리교가 시작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라비안 형제들은 존 웨슬리를 통해 영국에서 모라비안 형제회가 잘 뿌리내리고 크게 부흥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의 멘토였던 피터 뵐러는 173851일에 페터레인 신도회(Fetterlane Society)’를 조직하고 존 웨슬리를 지도자로 세우게 됩니다.

 

존 웨슬리가 회심한 이후 독일에 있는 모라비안 공동체를 직접 방문하고 돌아왔을 때, 페터레인 신도회는 32명으로 숫자가 증가한 상태였습니다. 웨슬리는 페터레인 신도회를 진정한 기독교 공동체로 세우고자 하는 열정과 열망으로 그들을 정성껏 양육하며 보살폈습니다.

 

성령세례를 체험했던 197911일 신년회 때는 페터레인 신도회가 60명으로 더욱 크게 증가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페터레인 신도회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모라비안 형제회 목사였던 필립 몰터(Philip H. Molter)’가 페터레인 형제회 안에 정적주의(quietism)를 퍼뜨렸던 것입니다. 정적주의는 칭의의 은혜로 완전한 믿음을 소유하기 전에는 어떠 은혜의 방편에도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몰터는 완전한 믿음을 얻기 전에는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행하는 예배와 성례전과 기도와 찬송과 성경 공부 및 다른 모든 의식에 결코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정적주의는 온전한 믿음을 얻기 전까지 어떤 종류의 선행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온전한 믿음을 얻기 전까지 성만찬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적주의는 더 극단적으로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면 주일에 교회도 가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는 몰터의 주장에 정반대의 설교를 했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얻으려면 은혜의 방편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방편은 신앙을 확인하는 예식만이 아니라 회심하게 만드는 의식이라고 설교했던 것입니다.

 

페터레인 신도회는 몰터파와 존 웨슬리파로 분열되게 되었습니다. 논쟁은 가열되었고 갈등과 불화와 증오심이 표출되면서 분열은 점점 더 깊어져갔습니다.

 

웨슬리는 몰터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길에서 돌아설 것을 촉구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웨슬리는 신도회에 짧은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이제 당신들을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들 중에 누구라도 나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를 따르십시오.”

 

존 웨슬리는 몰터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과의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따르는 사람들은 18명이었습니다.

 

17404월 존 웨슬리는 페터레인 거리의 건너편 파운더리에 새로운 장소를 마련하고 독립된 신도회를 조직하여 7월부터 본격적인 신도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파운더리 신도회가 바로 감리교 최초의 신도였습니다. 감리교는 파운더리 신도회가 세워지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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