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이야기 62) 헌팅돈 백작 부인(Lady Huntingdon)
조지 휫필드 이후 예정론을 따르던 감리교 운동의 지도자는 헌팅톤 백작 부인이었습니다. 헌팅돈 부인은 귀족 출신으로 경건한 인격과 고매한 인품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페러(Ferrers)의 백작 위싱턴의 딸이었고 헌팅돈의 백작 테오빌로스의 미망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시댁 가족들은 모두 더 경건한 신앙인들이었고, 교회를 세우는 일과 전도하는 일에 헌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녀는 시누이를 통해 존 웨슬리를 알게 되었고, 부흥 운동 초기에 존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회심을 체험했습니다. 회심한 후에 그녀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존 웨슬리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1746년 그녀의 남편이 죽자 그녀는 자신의 모든 역량과 물질을 감리교 부흥 운동에 쏟아부었습니다. 그녀는 존 웨슬리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습니다. 1749년까지 그녀는 존 웨슬리가 가르친 완전 성화 교리를 열정적으로 대변했습니다.
그녀는 귀족이고 부자였기 때문에 영국 사회의 상류층과 폭넓은 교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주선으로 존 웨슬리도 상류층과 만나 교류하며 그들에게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저택의 크고 화려한 응접실에 상류층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헌팅돈의 ‘응접실 전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응접실에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감리교 부흥 운동 초기에 그녀는 귀족 사회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1748년 헌팅돈 부인은 미국에서 돌아온 휫필드를 초청하여 설교를 자주 들었습니다. 그녀는 휫필드를 대하면서 존 웨슬리와 비교해서 휠씬 더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지 휫필드는 자기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헌팅돈 부인의 후원이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존 웨슬리보다 헌팅돈 부인에게 휠씬 더 순종적이었고 협조적이었습니다.
헌팅돈 부인은 조지 휫필드의 설교를 들으면서 휫필드보다 더 강경한 예정론자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녀는 만인구원과 완전 성화의 교리를 비판했고 예정론을 대변하는 평신도 전문 신학자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존 웨슬리와 결별하고 휫필드의 가장 강력한 동역자요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가지고 있던 재산으로 잉글랜드 남부와 웨일즈와 런던에 여러 개의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녀는 온천이나 휴양지에 예배당 짓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1768년 헌팅돈 부인은 영국 성공회의 복음주의 목사를 길러낼 목적으로 웨일즈 트레베카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1783년 그녀가 세운 교회들은 영국 성공회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헌팅돈 부인이 세운 교회들은 하나의 교단처럼 움직이게 되었고 또다른 선교회처럼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1791년 헌팅돈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가 세운 예배당은 80개가 넘었습니다. 그러나 존 웨슬리가 이끄는 감리교 부흥 운동과 달리 헌팅돈 부인이 세운 교회들은 연결 조직이 약했습니다. 그녀는 예배당을 돌볼 성직자를 공급하고 관리하는 것조차 힘겨워했습니다.
존 웨슬리가 이끄는 감리교 부흥 운동이 사회적 성결 운동과 박애 운동 같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던 것에 비해 예정론을 따르던 감리교 부흥운동은 큰 영향력 없이 아주 작은 연합체로 남게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가 이끄는 부흥 운동은 부자들의 후원을 많이 받지 못했습니다. 부자나 지식인이나 권력자들은 감리교 부흥 운동의 후원자들이 되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존 웨슬리가 이끄는 부흥운동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사회를 거룩하게 변화시키고 민족을 개혁하고 구원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