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이야기 78) 사랑의 구제 운동

(존 웨슬리 이야기 78) 사랑의 구제 운동

시온 0 30


존 웨슬리는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거나 기껏해야 약간의 동정심을 갖게 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그들의 가난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 학생 시절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이해하고 도우려고 큰 노력을 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전도 여행 중에도 가는 곳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도왔습니다. 그는 평생 그렇게 살았습니다.

 

존 웨슬리는 주로 금요일과 토요일마다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했습니다. 1741년에는 며칠 동안 런던의 빈민가를 집집이 방문하여 구제하고서 연합신도회에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수많은 형제자매가 일용할 양식이 없으며 입을 옷이 없으며 자신들의 잘못도 없이 실직하고 병들고 죽게 되었습니다. 나는 힘을 다해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치료해주고 일자리를 마련하느라 애썼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호소합니다. 그들을 위한 필수품을 가져오십시오. 그리고 일주일에 1페니 또는 그 이상을 가져와 그들을 구합시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소한 일주일에 1페니를 주어 자선을 행하자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감리교인들은 일주일에 1페니를 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존 웨슬리의 이러한 가르침과 모범은 칭의, 성화, 일주일에 1페니라는 유명한 감리교 표어를 낳았고, 모든 감리교인의 신앙의 규칙과 실천 사항이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의 일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고통에 아파했던 기록들이 많습니다. 1753년 어느 금요일과 토요일에 존 웨슬리는 가난한 집을 방문하여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양식과 약품을 주고 그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순수함과 세상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그들의 신앙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또 그는 가난하여 자립할 수 없는 장애인들과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구빈원(poor house)’을 방문하여 그들을 도왔습니다.

 

이런 구제의 삶은 그가 80세가 지나서도 변함없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추운 겨울이 되면 도시의 빈민 가족들을 위해 많이 돕고도 부족하여 4일간 거리의 사람들과 집집이 방문하여 200파운드를 모금하고는 심한 몸살과 이질에 걸려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남에게 시키기만 하는 차가운 선생이 아니라 남보다 먼저 실천하고 사랑의 언덕길을 발로 뛰는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이날의 사정을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석탄과 빵을 갖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그들이 그 이상의 식량과 의복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4일간이나 다니면서 200파운드를 모금하여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습니다. 모든 거리가 녹아내리는 눈으로 덮였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녹는 눈 속에서 발이 빠지면서 이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급한 사람들부터 잘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심한 이질과 몸살로 다음날까지 눕게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모든 사람의 따뜻한 사랑의 친구였고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가난이란 부인과 결혼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여 모든 것을 내어주었던 아시시의 성 프란스시(St. Francis of Assisi)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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