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이야기 83) 나그네와 죄수와 병자의 친구인 감리교

(존 웨슬리 이야기 83) 나그네와 죄수와 병자의 친구인 감리교

시온 0 9


존 웨슬리는 늘 복음 전파와 함께 가난한 이들을 돕는 사랑 실천을 병행했습니다. 이에 많은 감리교인들이 존 웨슬리의 사랑 실천에 감동하고 자신도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1757년 요크셔에 살고 있던 감리교 노동자가 자기 집을 집 없는 나그네를 위해 내놓았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개조하여 늘려서 50명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집 없는 이들을 모아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존 프리처드라는 감리교 성도는 자신이 지도하는 반회(band)의 회원들과 함께 나그네를 위한 공동체를 만들어서 모든 소유를 공유하고 함께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북부 산업 공장지대 노동자들을 위한 존 웨슬리의 사랑 실천은 웨슬리 사후에 감리교 노동조합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산업사회를 개혁하고 성화하는 노동자 선교에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회는 부자들과 귀족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만 잘못을 저지르거나 빚 갚기를 하루만 지체해도 감옥에 넣고 사형에 처하던 무시무시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영국 감옥은 언제나 포화상태였고 억울한 죄인들은 늘어만 갔습니다.

 

당시 감옥은 지상의 저주받은 감옥이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에 다닐 때부터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방문하여 전도하고 돕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는 그 일을 평생 계속했고, 사람들은 존 웨슬리는 영국에 있는 교도소장과 교도관들과 죄수들의 아버지로 칭하며 마음으로 깊이 존경을 표현했습니다.


런던 타이번(tyburn) 감옥은 형무소이면서 동시에 사형장이었습니다. 사형수들은 죽기 전에 꼭 존 웨슬리를 만났습니다. 존 웨슬리는 사형장 마당에서 죄수들과 사형수들에게 설교했습니다. 존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사형수가 죽기 전에 구원의 확신을 얻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존 웨슬리는 당시 지옥과 같은 감옥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1743년 감리교 총회에서 죄수들이 있는 감옥을 방문하는 것을 감리교 신도회의 규칙으로 정했고, 1778년 총회에서는 감리교 설교자들을 감옥 죄수들을 위한 목회자로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는 타이번에서 사형수들이 죽기 직전까지 함께 있었고, 사형수들의 마지막 고백과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웨슬리 형제는 감옥에 있는 죄수들과 사형수들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의 목자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전도자로서 인간의 영혼을 돌보는 영혼의 의사인 동시에 인간의 몸을 돌보는 의사 역할까지 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18세기 영국은 의료기술이 많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병에 걸리면 더욱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병자들을 돌보는 박애 전도를 구체적으로 실행했습니다. 1741년부터 그는 신도회 안에 병자 방문인을 두어 사역을 하게 했습니다. 병자 방문인들은 매주 1회 정기적으로 신도회 지역의 병자들을 방문하여 병의 증상을 조사하고 약을 제공하고 영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파운더리, 뉴룸, 뉴캐슬 고아원에 무료 진료소를 두어 운영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조지아 선교를 준비하면서 실제로 의학을 직접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746가난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처방전 모음이라는 작은 책자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1747년에는 원시의학이란 의학서절을 저술하여 보급했습니다. 이 책은 250가지가 넘는 질병을 치료하는 829가지 치료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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