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이야기 98) 영국 감리교회 독립의 여정 1

(존 웨슬리 이야기 98) 영국 감리교회 독립의 여정 1

시온 0 9


존 웨슬리가 살던 당시 영국은 성공회 국가였습니다. 영국 국민의 대다수는 태어나면서 성공회 교인이 되었습니다. 영국 성공회는 모든 국민에게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모든 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성공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생활 전반에 차별과 핍박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감리교 부흥 운동이 이룬 성과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감리교 부흥운동 초기인 1740년대에는 감리교 신회는 브리스톨, 킹스우드, 콘월, 런던, 뉴캐슬 등 특정 지역에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760년대 들면서 감리교 부흥운동은 전국적으로 신도수가 급증하게 되었습니다.

 

1767년에는 전체 감리교 신도수가 약 30,000명이 달했습니다. 1768년부터 존 웨슬리가 세상을 떠난 해인 1791년까지 신도 수는 매년 약 5%씩 성장했습니다. 이때 감리교 신도회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은 약 80,000명이 되었습니다. 당시 영국 전체 인구의 약 1%가 됩니다. 1771년부터 1801년 사이에는 감리교 신도 수가 10년마다 41%, 52%, 62.7%씩 성장했습니다.

 

감리교 역사를 연구한 헨리 랙 박사는 존 웨슬리가 죽던 해에 감리교 신도수는 약 3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신도회에 정식으로 등록하여 활동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신도회에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존 웨슬리를 따르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정식 감리교 신도회 숫자보다 두 배에서 다섯 배까지 더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 무신론자 중에도 존 웨슬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영국인들은 태어나면서 성공회 교인이 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감리교 신도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초대 교회의 제자들처럼 회심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존 웨슬리가 살던 시대는 이 소수의 감리교 성도들이 영국 사회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시대였습니다.

 

감리교 신도회가 커지고 존 웨슬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존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정리하고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 문제는 감리교의 미래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과제였고, 존 웨슬리 사후에 감리교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과제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감리교 신도회 안에서 안수받은 성직자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습니다.

 

당시 감리교 신도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은 네 사람 뿐이었습니다.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와 존 플레처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지 휫필드는 웨슬리 형제를 떠나서 다른 길을 갔다가 1771년에 죽었습니다. 1785년에는 존 웨슬리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제자이자 동역자였던 플레처도 죽었습니다. 3년 후에는 평생 같은 길을 걸어왔던 동생 찰스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목회자로 홀로 남은 존 웨슬리는 감리교 지도자들과 평신도 설교자들에게 영국 성공회에서 아주 독립하여 새로운 교회, 새로운 영국 감리교회를 설립하자는 끈질긴 요구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존 웨슬리에게 모든 감리교 예배당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감리교 설교자들에게 예배를 집례하고 성만찬을 인도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끈질기게 호소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자신을 분리주의자라고 공격하는 성공회 목회자들에게 자신은 누구보다 충성된 성공회 목회자라고 주장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국 성공회에서 독립하자는 감리교 신도들의 요구에 조금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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