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아포리즘 (2022년 4월 27일 수) - 체험 (제주 미술관 순례 – 유민미술관 2)

오늘의 아포리즘 (2022년 4월 27일 수) - 체험 (제주 미술관 순례 – 유민미술관 2)

시온 0 1612

오늘의 아포리즘 (2022427일 수요일) - 답습과 체험의 차이 (제주 미술관 순례 유민미술관 2)

 

2022425()-28()일까지 강화 남 지방 목사님들과 함께 제주도 퇴수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목사님마다 주제를 가지고 제주도를 다니고 있는데 저는 제주도에 있는 미술관을 다니고 있습니다.

 

25일 월요일에 제주도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휘닉스파크 섭지코지 안에 있는 유민미술관입니다. 유민미술관은 중앙일보 회장을 지낸 홍진기 씨가 수집한 유럽의 유리공예작품을 전시해 놓은 곳입니다.

 

189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유럽에서는 새로운 예술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을 아르누보(Art Nouveau)’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프랑스어로 새로운 예술이란 뜻입니다. 유민미술관에 전시된 유리공예작품들은 아르누보 정신에 따라 주로 프랑스 낭시지역에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아르누보(Art Nouveau) 운동은 예술을 고고한 미술관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사용하는 생활용품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한 영국 예술 공예 운동(Art & Craft Movement)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프랑스 낭시 지역의 유리공예가들은 대롱에 바람을 불어서 형태를 만드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색유리를 덧붙이고 조각하고 부식시키는 다양한 방법으로 새로운 유리공예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에밀 갈레, , 외젠 미셀, 르네 릴리크 등이 있습니다.

 

이 모든 작가의 작품을 유민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낭시파 유리공예가들은 자연에서 받은 영감과 일본 도자기에서 받은 영감을 결합하여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작품 하나하나를 보면서 이런 질문이 들었습니다.

 

왜 이게 예술 작품이지?”

 

너무나 아름답게 만든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아름답고 기막힌 기술을 사용했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예술 작품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유리공예작품을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개척한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작품을 보면서 왜 이 작품들이 예술 작품인지 금방 알았습니다.

 

이들이 그려내고 만들어낸 유리공예작품들은 자신들이 자연을 자세히 관찰하고 체험한 것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호박을 그린 것으로 생각했던 작품이 토마토였습니다. 제가 배추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생각했던 작품이 튤립이었습니다. 작품에 그려지거나 붙여진 잠자리는 너무나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이미지를 답습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자연을 자세히 관찰하고 체험한 것을 그대로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 왜 토마토를 호박처럼 그렸느냐고 물으면 아마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왜 튤립을 배추처럼 그렸느냐고 물으면 같은 대답을 할 것입니다. 이들은 남들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를 답습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눈으로 관찰한 모습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이들이 만든 것은 유리병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자연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아르누보 작가인 에밀 갈레(Emile Galle)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연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감흥도 없다. 꽃과 나무, 나비와 잠자리, 바다와 하늘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런 자연을 통해 우리 자신의 정서와 경험,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예술 공예를 보면서 제가 감탄하고 놀랐던 것은 너무나 낯설게 보이는 곤충과 식물들의 모습입니다. 제가 이들에게 왜 이렇게 그렸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제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낭시파 유리공예가들에게 영감을 준 영국 공예 운동의 대표작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자연에서 직접 영감을 얻어야 합니다.”

 

예술과 일상용품의 경계는 기존의 이미지를 답습하느냐 아니면 내가 체험한 나만의 체험을 보여주느냐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만의 체험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존의 생각과 고정 관념을 답습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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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체험은 진짜 체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체험은 내가 가졌던 이미지와 고정 관념을 답습하는 것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은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책이나 그림에서 보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잠자리를 보지만 우리는 진짜 잠자리를 보는 것이 아니고 책이나 그림에서 봤던 잠자리를 그냥 연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체험한다는 것은 기존에 내가 가진 고정 관념을 벗겨내는 것입니다. 고정 관념을 벗겨내지 않으면 나는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에 내가 가진 이미지를 답습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22절입니다.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4:22)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우리에게 새로움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해주실 때 우리는 구습을 반복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새로운 눈으로 나를 보고 아내를 보고 자녀들을 보고 교우들을 보고 이웃들을 보고 나라와 만족을 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술의 시작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기존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모든 사람과 환경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삶은 환경과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51:1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3:19)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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