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보

광성보

마리힐 0 5139

● 광성보 (사적 제227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위치한다. 지정 면적은 14만4,632㎡이고. 1658년(효종 9)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종9품 별장이

지휘하고, 군관 15명에 토졸 45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광성돈대는 처음에는 네모난 형태로 축조되었으나 이후 원형으로 개축되었고,

처음 축조 당시 둘레는 105.6m에 38개의 치첩을 설치했다. 광성보 관할 돈대는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 광성포대 등이다.

1745년(영조 21)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곽의 형태를 원형으로 고친 것으로 보이며, 성문을 만들고 문루에는 “바다를 제압한다”는 뜻의 ‘안해루(按海樓) 현판을 걸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광성보 화약고에 불을 질러 일부가 파괴되었다. 그때 양헌수 장군은 야간에 543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서 프랑스군을 패퇴시켰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는 가장 격렬한 격전지로 어재연장군이 이곳에서 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당시 전투에서 조선군은 53명이 전사하고, 24명이 부상당했으며, 미군의 경우 3명이 죽고 10명이 부상당했다 한다. 1977년에 복원 정화 사업을 실시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3a701aa005802fd1108c0ab147204cde_1520838087_1379.bmp       3a701aa005802fd1108c0ab147204cde_1520838099_658.bmp

● 광성포대 (손돌목포대 Ⅰ‧ Ⅱ)

  

    용두돈대로 향하는 중간지점 화장실 아래 우측 약30m 지점부터 좌측으로 설치되어 있다. 이 포대는 1999년과 2000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팀에 의하여 발굴되기도 하였다. 16좌의 포대를 갖추고 있으며, 맞은편의 덕포진과 함께 협공할 수 있는 위치에 축조했다. 당시 조선의 가장 큰 대포는 홍이포로 중국 명나라와 네덜란드 전쟁 때 네덜란드인을 머리카락이 빨간 오랑캐라고 부른 데서 유래된 포이다. 조선은 정묘호란 때 청나라 군대의 홍이포에 압도당해 홍이포 도입과 제작을 실시해 배치했다고 한다.

 

    용두돈대 앞의 강화해협 너비가 약 500m로 프랑스나 미국의 전함을 충분히 공격할 수 있으나 발사 속도가 매우 느렸고, 당시 외국 함대의 포탄처럼 폭발하지 않고 탄알이 날아가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패전할 수밖에 없었다.

 

 

● 용두돈대

 

   쌍충비각에서 왼쪽 강화해협 방향으로 약 380m 내려가면 용의 머리 모양을 한 돈대가 나온다. 1726년에 작성돈대가 축조되면서 총 53개 돈대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1999년에 육군박물관 팀이 손돌목돈대 아래에 돌출된 지형을 조사할 때 옛 석축이 남아 있어 망루로 보지 않고 돈대로 보면서 이름을 용두돈대로 붙이고, 54개소의 돈대가 강화도에 존재한 것으로 보고했다. 1977년 성벽을 복원하면서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를 세웠다.

 

                   

3a701aa005802fd1108c0ab147204cde_1520838185_5127.bmp 

 

[강화해설사]

    용두돈대 앞을 지나 큰소리 내며 올라가는 밀물은 어디까지 가는 걸까. 강화해협을 거칠게 올라가는 밀물은 한강의 끝 유도를 거슬러 행주대교 밑 신곡수중보까지 간다고 한다. 그런데 뱃사공 손돌이는 어떻게 이런 바다를 건너 다녔을까. 전설에 의하면 손돌이는 바닷길을 알고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강화해협을 지나 한양으로 올라 다니던 배는 조운선과 시선배였다 한다. 현재 강화 시선배는 남아있지 않고 “시선뱃노래”만이 남아 사라진 옛 풍물시를 전해주고 있다.

 

    시선(柴船)이란 일종의 경강상선(京江商船)으로 생선 땔감 따위를 싣고 염하, 조강,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객주 여각에 넘기는 5, 6인승 소규모 장삿배였다. 옛날 장작이 연료의 주종을 이룰 때 시신(柴薪:땔나무) 시탄(柴炭) 시장은 늘 성황을 이루었다. 땔감나무, 생선, 새우젓, 소금 같은 물화를 노들강, 용산강, 마포강 서강 등 5강 연안의 객주 여각에 모두 넘긴 강화시선은 가뿐한 빈 배로 귀향길에 오른다. 이 시선을 부려 경강을 오르내릴 때 강화 뱃사람들이 부르던 ‘시선뱃노래’가 가냘픈 명맥을 잇고 있다.

 

    서세동검시절 프랑스의 병인양요, 미국의 신미양요 침략 군함들은 이 물길을 따라 올라와 먼저 개항시킨 일본처럼 조선도 개항시키려 였다. 그러나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뒤이어 들어온 일본은 운요호를 앞세워 조선을 무력화 시키고 불평등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 , ,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