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흥궁, 원범이네 집

용흥궁, 원범이네 집

마리힐 0 5057

 ● 용흥궁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조선 제25대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5년간 원범이라는 이름으로 살던 집터이며 철종으로 등극 후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넓게 짓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좁은 골목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두고 있어 창덕궁 낙선재와 같이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궁 안에는 철종 집자리임을 기록한 비석과 비각이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1동 별전 1동 등이다.

 

    철종은 14세(1844년, 헌종10) 때 큰형 회평군의 옥사에 관련되어 강화에 들어왔으나 문헌 기록에 ‘위리안치 되었다’는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가시울타리로 둘러치지 않은 현재의 용흥궁 터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849년 (헌종15)에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종사를 잇는 국왕으로 19세의 철종을 순조와 순원왕후의 양자로 입적해 즉위시킨 후 수렴청정을 하기로 결정했다. 곧바로 덕완군에 봉해지고, 조부모 은언군 내외에 대해 신원이 복직되었다. 강화에서 출발한 철종의 봉영 행렬이 창덕궁으로 들어와 희정당에서 관례(갓을 쓰는 의식)를 행한 후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했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철종 두 사람뿐이었다.

 

    철종의 조부 은언군은 영조의 손자이고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은언군은 정조의 적극적 배려로 중신들의 사사해야 한다는 주창에도 불구하고 강화부에 귀양오게 되었다. 이후 순조가 즉위하면서 천주교 박해사건이 발발하였는데 은언군의 처와 며느리가 함께 사사되었다. 은언군의 5남 전계대원군이 철종의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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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종 잠저 비                                                                 용흥궁 대문각
                                                                 

 

    용흥궁 대문 앞에는 영의정 정원용의 비와 유수 정기세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있다. 영의정 정원용은 철종을 한양까지 봉영한 분이고 유수 정기세는 용흥궁을 지은 분으로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다.

 

   강화가 왕과 왕족의 유배지로 선택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왕족을 일반인들과 같이 절해고도에 유배한다면 훗날 일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즉‘선처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다시 왕권 다툼으로 연결될 소지가 있는 왕족들을 철저히 감시하기 위해 한양과 지척에 그들을 두어야 했다. 따라서 이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은 강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강화와 교동도에 유배된 왕과 왕족 중 유일하게 광해군만이 천수를 누렸을 뿐 모두 유배지에서 사사되었거나 단명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참고 : “신편강화사 중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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