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석수문 , 연무당 옛터

강화 석수문 , 연무당 옛터

마리힐 0 4909

● 강화 석수문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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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읍의 중심부를 흐르는 동락천 위에 설치한 강화산성의 수문 두 개 가운데 하나 상수문(上水門)이다. 이 수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어 강화읍을 통하여 흐르는 동락천을 가로지르는 수문으로서 조선 숙종37년에 축조되었다. 3개의 무지개 모양을 한 홍예문으로 재질은 화강암이며 길이 18.2m에, 높이 2.7m 폭 4.7m이 홍예의 높이는 1.7m,, 폭은 3m이다.

 

 

    1910년까지 갑곶리 동락천 입구의 다리로 사용하다가 1972년 하수문(下水門) 자리로 옮겼던 것을 1993년 동락천 복개공사로 원래의 상수문 자리로 다시 옮겨 복원하였다. 강화산성 서문 첨화루(瞻華樓)가 길 건너 있으며 하수문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강화읍 중심을 흐르는 동락천은 4차선으로 복개되어 48국도가 통과하며 계속 동쪽으로 흐르는 동락천은 강화 하수종말

처리장으로 들어간다.

 

● 연무당 옛터

    조선 종7년 1870년 창건된 연무당은 지금의 상시장 군 농협 자리 서쪽에 있었는데 동소문 밖으로 옮겼다가 내성 서문에 당을 세우 그 전면에 조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종13년 1876 강화도조약이 최종 조인된 장소로 이 곳에서 체결된 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는 부산, 인천, 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암울했던 과거사를 잊지 않기 위하여 비를 세우 민족 자주의식을 드높이 간직해야 한다는 경를 하 있다.

 

    연무당은 1870년 종 7년 강화유수부의 군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세워진 조련장으로 1876년 일본과의 강압적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으나, 우리나라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   이 조약으로 인천, 부산, 원산의 항구가 개항되 일본에 치외법권을 인정하여 36년간 나라를 빼앗긴 결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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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무당 옛터 (2018. 2. 26.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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