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오리(分五里)돈대 (유형문화재 36호)

분오리(分五里)돈대 (유형문화재 36호)

시온 0 4177

● 분오리(分五里)돈대 (유형문화재 36호)


    동막 해수욕장 소나무 숲 왼쪽 끝 언덕 위에 돈대가 있다. 조선 숙종5년(1679년) 강화유수 윤이제가 축조한 분오리 돈대다. 이 돈대는 강화도 최남단에 위치하며 강화 남단갯벌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자연 암반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기 때문에 반달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1994년 복원되었는데 지명 분오리는 사기리에서 동막리까지 10리길의 가운데 지점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강화에 돈대를 설치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강화는 지형이 요새 조건을 갖추었으며 위치상 한양과 하루거리에 지나지 않아 전쟁이 나면 최고의 왕실 피난처이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봉림대군(효종) 등을 강화로 먼저 보내고 자신도 다음날 이곳에 들어가려 했으나 퇴로가 차단되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강화는 함락되었고, 남한산성으로 피난 갔던 인조임금도 청나라에 항복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때 강화가 함락된 데에는 군령체제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강화유수의 직임은 나라에서 임명하지만 행정상의 직책에 불과했고, 군사지휘권이 없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1646년에도 강화의 수군은 통어영 소속이었으며, 육군은 총융청 산하에 있었으므로 강화유수의 명령은 병사들에게 미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1656년(효종 7) 부터 강화의 군사지휘체계를 경기수사가 지휘하던 수군 중심의 체제로부터 강화유수가 지휘하는 육군 중심으로 전환하여 비상시 강화유수가 지휘권을 갖도록 한 것이다. 그리하여 1678년(숙종 4) 강화에는 12개의 진보와 53개의 돈대가 설치되었다. 돈대는 바다로 접근하는 적군의 배를 멀리서 발견하여 선제 방어하기 위해 바닷가 높은 언덕에 축조하였다. 화도면에는 내리 선수돈대, 송강돈대(소루지 돈대), 사기리 분오리돈대, 동막리 송곶돈대, 여차리 미루지돈대, 장화리 장곶돈대, 북일곶돈대가 있다. 강화 군도(郡道)를 따라 마니산을 한바퀴 돌다보면 분오리돈대와 장곶돈대는 주차장이 있고 교통편이 편한 위치이므로 쉽게 돈대를 들러볼 수 있다. 강화 남단 갯벌(300㎢)을 한눈에 가장 넓게 보고 싶을 때는 분오리돈대에 오르면 된다. 넓은 바다 건너 옹진군의 장봉도 모도, 시도, 신도가 나란히 보인다. 특히 낙조에 물든 바닷물의 해그림자는 환상적이다. 멋진 새해 소망을 위해 한컷! 

 

묵은해 마지막 낙조를 보내며 (2014. 1. 30. 18:00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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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오리돈대, 멀리 옹진군이 보인다 (2014. 1. 30. 18:00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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