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전성
2001년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의 도로로 사용하고 있는 둑의 동벽에 자전거도로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강화 외성으로 보이는 석축과 전돌을 발견하였다. 이에 즉시 강화군에 알려 공사를 일단 중지시킨 다음 지표조사를 실시한 바 강화외성의 일부분임을 확인하였다. 이곳에서 전돌이 수습되고 전돌로 쌓은 전성이 계속 발견되어 이 부분이 조선 영조때 축조된 강화외성의 전성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에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에서는 강화군과 협의하여 강화전성을 지표조사하게 되었다.
강화외성은 고려 고종때 강화로 천도하여 1233년에 토성으로 축조하였다. 그러나 고종 1259년 고려사 기록에는 몽골의 강압에 의해 모두 헐었다고 하였다. 그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숙종은 (1678~1690) 허물어진 고려외성을 다시 수축하고 돈대를 설치하였다. 『조선왕조실록』영조 18년10월조를 보면 “강화유수 김시혁이 강화의 토성이 비를 맞으면 허물어지고 있으니 청컨대 북경에서 벽돌을 구어 성을 쌓은 구례에 의해 개축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임금이 대신과 여러 장신(將臣)들에게 물으니 모두 편리하다고 하여 마침내 허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 20년 김시혁은 중국 북경에서 벽돌 굽는 법을 배워와 강화외성을 수축하였다. 이때 벽돌로 쌓은 강화외성의 일부가 오늘날 강화군 일원의 강화전성이다. 전성은 갯벌층 위에 다진 뻘층이 흘러내리지 않게 할석으로 외곽을 축조한 뒤 층층히 다진 다음 단단해진 토층 기반 위에 판석을 올리고 그 위에 기단석을 쌓은 다음 8-10단 정도로 전벽돌을 쌓아 올렸고 연접 부분은 강회로 처리하였다. 성벽의 내부에도 전돌로 보축하였으며 자연석을 채워서 성벽이 밀리지 않도록 하였다.
강화도 동부해안 북쪽 승천보에서 남쪽 끝 초지진까지 장장 24km길이의 장거리에 모든 성채를 갯벌 진흙과 석축 그리고 전축으로 3년 동안에 쌓았다는 것은 대단한 축성기술이다. 강화외성이 전성으로 축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은 강화읍 용정리, 갑곶리, 선원면 지산리, 연리, 불은면 오두리, 길상면 초지리 해안등 외성 전구간에서 확인되고 있다.
수원 화성은 이보다 52년 이후 인 정조20년 1796년에 강화전성 쌓을 때의 경험 기술로 쌓았다. 정조때 실학자 초정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벽돌 사용을 주창한 것도 이보다 반세기 뒤였다.
불은면 오두리 강화전성은 인천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으나 강화외성 전체가 사적 제452호로 승격됨에 따라 그 안에 포함 되어 해제되었다.
☞ 강화전성 지표조사 보고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