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석수문 , 연무당 옛터

강화 석수문 , 연무당 옛터

마리힐 0 4751

● 강화 석수문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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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읍의 중심부를 흐르는 동락천 위에 설치한 강화산성의 수문 두 개 가운데 하나 상수문(上水門)이다. 이 수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어 강화읍을 통하여 흐르는 동락천을 가로지르는 수문으로서 조선 숙종37년에 축조되었다. 3개의 무지개 모양을 한 홍예문으로 재질은 화강암이며 길이 18.2m에, 높이 2.7m 폭 4.7m이고 홍예의 높이는 1.7m,, 폭은 3m이다.

 

 

    1910년까지 갑곶리 동락천 입구의 다리로 사용하다가 1972년 하수문(下水門) 자리로 옮겼던 것을 1993년 동락천 복개공사로 원래의 상수문 자리로 다시 옮겨 복원하였다. 강화산성 서문 첨화루(瞻華樓)가 길 건너 있으며 하수문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강화읍 중심을 흐르는 동락천은 4차선으로 복개되어 48국도가 통과하며 계속 동쪽으로 흐르는 동락천은 강화 하수종말

처리장으로 들어간다.

 

● 연무당 옛터

    조선 고종7년 1870년 창건된 연무당은 지금의 상시장 군 농협 자리 서쪽에 있었는데 동소문 밖으로 옮겼다가 내성 서문에 당을 세우고 그 전면에 조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고종13년 1876 강화도조약이 최종 조인된 장소로 이 곳에서 체결된 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는 부산, 인천, 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암울했던 과거사를 잊지 않기 위하여 비를 세우고 민족 자주의식을 드높이 간직해야 한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연무당은 1870년 고종 7년 강화유수부의 군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세워진 조련장으로 1876년 일본과의 강압적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으나, 우리나라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   이 조약으로 인천, 부산, 원산의 항구가 개항되고 일본에 치외법권을 인정하여 36년간 나라를 빼앗긴 결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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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무당 옛터 (2018. 2. 26.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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