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학파의 학문과 사상
강화는 고난의 땅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조선후기 인간 본연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강화학파가 배태된 곳이기도 하다. 정제두(鄭齊斗)가 표연히 서울을 떠나 안산을 거쳐 만년에는 다시 강화 양도면 하일리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그곳 지명을 따서 호를 하곡(霞谷)이라 하였다.
조선후기 양명학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당하는 분위기 속에서 양명학적 실학의 이념을 강조하며 민족 주체적인 학풍을 형성하고, 새로운 인간 발견의 정신세계를 심화시켜 나갔던 문인 학자들은 강화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을 강화학파(江華學派)라고 부른다.
강화학파는 정제두(鄭齊斗)로부터 비롯되었다. 정제두는 성리학에 대한 회의와 붕당정치의 폐단으로 인한 정치 현실의 불신을 떨쳐버리기 위해 강화로 들어온 것이다. 1709년(숙종 35) 이후 20여 년 동안 인간과 사회를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성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정제두가 강화에 자리를 잡게 되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도 강화로 들어왔다. 손녀사위 이광명이 화도면 사기리로 들어와 제자가 되었고 손녀사위 신대우는 양도 옹일리에 자리를 잡고 학풍을 이어갔다. 고려궁지 강화유수부 동헌 현판글씨를 쓴 백하 윤순은 정제두의 아우 정제태의 사위로 정제두 문하를 40여년 간 드나들면서 학문을 이었다.
18세기 초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민족 주체적인 학풍을 형성하고 새로운 인간 발견의 정신세계를 심화시켜 나갔던 문인 학자들의 학맥인 강화학이 비록 봉건적 신분질서와 중세의 사회의식을 뛰어 넘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지식인의 자세는 20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실학적 전통을 연면히 지키며 강화학파의 맥을 이어오게 되었다.
강화학파는 자신들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사상을 문학적인 시와 산문으로 형상화하여 담아내는 일이 많았다. 특히 문학을 통하여 민족의식의 자주적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그중 이시원(李是遠)은 병인양요 후 자결하는 절의 정신을 보였고, 이건창은 당대의 가장 냉철한 지식인으로 사기리에 생가“명미당”이 있으며, 이건승(李建昇)은 가난한 사재를 털어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 교육에 힘쓰는 동시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참고 : 신편강화사 중편)
● 정제두 묘 (인천시 기념물 56호)
정제두의 본관은 영일, 호는 하곡이며 정몽주의 후손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양명학 연구에만 전념하였으며 61세에 선조들의 무덤이 있는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하곡 마을로 옮겨와 살았다. 그는 소론의 가학으로서 학파를 형성하여 강화도를 중심으로 이건창, 이건승, 정인보에게로 그 학통이 계승되었다.
양도면 하일리 하우고개 오르는 큰길 옆에 정제두 묘가 있다. 부친 정상징 묘가 앞에 있고 정제두 묘는 위쪽에 있다. 그리고 계속 하우고개를 넘으면 좌측에 “하곡 정제두 선생 숭모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