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허동천 이야기

함허동천 이야기

마리힐 0 5621

   

126e0090e76b0657b9219a0b154dcef0_1528273200_5954.jpg

126e0090e76b0657b9219a0b154dcef0_1528273201_7462.jpg
 

 

    마니산 줄기 동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 위치한 함허동천은 서울근교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야영장으로 경치와 산세가 빼어나고 수도권 제1의 관광휴양지로 작은 규모의 계곡이 운치 있게 형성되어 있다. 함허동천 야영장은 계곡 주변을 활용한 4개의 야영장, 취사장, 샤워장, 족구장, 다목적광장 등이 갖추어져 있고 놀이마당 2개소가 있어 단체별 야유회 활동을 할 수 있다.

  

    마니산 입구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정상의 참성단을 거쳐 함허동천으로 내려오는 등산로와 신라 선덕여왕 8년에 회정선사가 창건하고 세종 8년에 함허대사가 보수하였다는 정수사로 내려오는 두 개의 등산로가 있는데 모두 경치가 빼어나 평일은 물론 공휴일, 피서철, 단풍철 등 항시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등산로이다. 등산로 중간 함허정에 오르면 서해의 영종도와 크고 작은 섬들을 볼 수 있는 전망대도 설치되어 있다.

    [참고 : 강화군 함허동천 소개 글]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함허동천(涵虛洞天) 야영장 이름은 함허대사가 정수사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해서 그의 당호인 함허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구불구불 넓지 않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대형 너럭바위에 “涵虛洞天” 이라 쓰여 진 곳에 이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뜻이란다. 20여년전 문화해설사로 답사하던 시절 위험한 너럭바위를 기어 오르던 까마득한 기억을 더듬으며 찾아보았는데 지금은 안전하게 근접 촬영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어 숨 가쁘게 올라온 다리를 쉬게 한다.

  

    조선은 고려후기 이후의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참신한 이념을 지닌 신흥사대부들에 의해서 건국되었다. 이들 신흥사대부들은 고려의 지배이념이었던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수용하였다. 조선 전기의 고승 함허당 기화는 1420년대에 당시 승유억불의 분위기 속에서 강화로 들어와 불교의 중흥을 위해 활약하였고 당시 사상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현재 화도면 사기리의 정수사에 그의 부도가 있다.

  

    강화군 화도면에는 함허대사의 흔적이 더 있다. 조선 전기 함허는 정수사(精修寺)를 중창 하였는데 이때 법당 서쪽에서 맑은 물이 샘솟는 것을 보고 사찰 이름을 정수사(淨水寺)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함허대사와 관련 있는 전설로는 동검도 앞 “각시의 서(嶼)” 바위섬 이야기가 있다.

 

      누명 쓴 각시가 죽은 각시바위 (참고: 강화사 중편 구비전승 67번)

어떤 새색시가 없어진 새신랑을 찾아 떠돌다 떠돌다 이곳까지 왔는데 수소문 끝에 정수사 주지로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정수사를 찾아간 색시에게 신랑은 남 대하듯 하였단다. 혹시 해서 몇 일간 기다렸지만 끝내 찾아주지 않아 바다에 빠져 죽었단다. 그것이 지금의 “각시의 서” 바위라 전한다.

 

    동막 해수욕장을 오가는 길에 분오리 돈대에 올라 건너편 동검도(東檢島)를 바라보면 바다 중간에 우뚝 솟은 얼핏 보면 잠수함 같은 바위가 있다. 밀물 때는 잠수함처럼 머리만 내밀고 썰물 때는 몸체까지 들어낸다. 그런데 몇 년전부터 이곳에 주인이 생겼다. 바로 저어새가 해마다 신방을 차리는 번식지가 된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바라다만 볼뿐 근접할 수가 없고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득해서 연구 목적의 관찰만 해야 한단다.

 

     각시바위는 강화군 천연기념물 205호 저어새 번식지중의 하나이며 철새 도래지로 보존하기 위하여 갯벌과 함께 천연기념물 419호 강화갯벌 및 저어새번식지로 문화재청이 2000년 지정하였다.

 

,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