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화도돈대(花島墩臺)

강화 화도돈대(花島墩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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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화도돈대(花島墩臺)

          지정번호: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17호(1999년 3월 지정)

          소 재 지 :    강화군 선원면 연리 54

 

[화도돈대 안내문]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화도(花島)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오두돈대·광성돈대와 함께 광성보에 속했다. 원래는 화도보 소속이었으나, 1710년(숙종 36)에 화도보가 폐지되면서 광성보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29m이다.


  참고서적 : 1999년 강화군 육군박물관 발행 『강화도의 국방유적』 

   화도돈은 내부 과수원으로 사용되고 있어 그 원형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돈대 주위로 외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이 돈대는 석벽터를 기준으로 볼 때 방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서쪽에는 새로이 쌓은 이질적인 석축이 있는데 이것은 원래의 돈대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돈대지 남서쪽에 화도 수문개축비가 있다. 과거에는 이 수문을 통하여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문화해설사 설명]

    1998년 강화 문화해설사를 시작할 때는 무너진 화도돈 터에 개인 과수원이 있었다. 몇 년후 화도돈대 터를 복원할 때 입구에 있던 몇 그루만 남겨 놓고 축대만 복원하였다.

   화도돈대(花島墩臺)는 강화대교를 건너 좌회전하여 해안순환도로 길로 직진 용진진을 지나고 언덕을 지나 계속 천천히 가다보면 수문다리가 보인다. 다리 건너기 전 왼쪽으로 마트가 보이며 주차공간이 있다. 


    화도돈대가 있는 화도(花島)는 섬이었는데 대청언 간척으로 본도에 편입되었다. 마니산이 있는 화도면(華道面) 과는 전혀 다른 이름이다. 숙종 바로 전 현종대에 고려 말에 축조된 승천제와 가릉언 등을 보수하고 대청언과 장지언을 축조하였다. 대청언을 축조할 때 배가 드나들던 포구를 막고 수문을 만든 내용을 수문개축비에 기록하여 수문 다리 건너편에 옮겨 놓았기에 함께 답사하는 것도 좋다.

  화도돈대는 위치적으로 개화기때 큰 전쟁 당시 대청포구의 역할이 컸기에 운반선의 각종수송물자지원과 후방지원 까지 순조롭게 감당하였을 것으로 전해진다.


    간척이전 대청포구를 통해 혈구산 밑까지 들어간 배는 지금의 불은면 삼성리 안양대학교가 있는 동네 “돌성”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고 전하며 지금도 삼성교회 길 건너편에는 “돌성저수지”가 있다. 지금의 삼성1리는 옛 돌성, 매재미[馬場洞]를 합하여 조성되어 있는데 매재미에는 혈구군 시절 나라의 말을 기르던 목장이 있었기에 지어진 이름이라 전한다. 한편 돌을 쪼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일컬어 매재미라 하였다고도 한다. 이곳 혈구산 돌성에서 질 좋은 돌을 채취하여 마차로 운반하고 배로 운송할 수 있어서 그 많은 48개 돈대의 석축을 쌓을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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